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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바울의 기독교

 래리 허타도 "주 예수 그리스도"










초창기 기독교의 예수 섬김을 논의하면서 먼저 바울을 분석하는 이유는.

1. 바울 기독교는 가장 그 진정성에 다툼이 없는 1차 자료를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낸다.

2. 바울서신은 이미 50년대에 설립되어 활동 중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이전에 존재했던 기독교의 믿음과 신앙관행에 관한 전승들을 포함하고 있다.

3. 바울이 참여한 그리스도인 집단에는 베드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 바나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집단에 참여한 때는 대략 32-34년으로 바울이 회심한 때이다.

4. 몇몇 바울서신은 이방인 회심자들에 대해 바울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의 의견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또 그 기록은 각 그룹들 간에 존재했던 다양성을 본질을 우리에게 가장 잘 시사해준다.

5. 유대교 전통과 이보다 더 큰 로마의 종교 환경이라는 정황에 비춰보면 바울서신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섬김은 종교사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했다.

6. 바울서신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도 바울 이후 그리스도인 그룹들의 특징으로 널리 자리잡게된 기독론 신조들과 섬김 관행을 예견하고 대변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위치는 이 기독론 신조들과 섬김 관행을 장려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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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개인적 요인들

"바울의 신학/기독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서신을 통해 볼 수 있는 초기 기독교의 첫 독자들이 만들어낸 역사사건들을 잘 이해하고자 바울 자신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바울이 가진 유대인 특유의 모습:

바울이 가진 유대교라는 신앙배경과 이 배경이 그리스도인인 바울의 믿음과 삶에 계속하여 끼친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시대 유대교의 종교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기독교를 "만든 사람"이었으며 반유대주의의 아버지였다는 하이엄 맥코비의 주장을 따로 논박해야할 주장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W.D.DaviesE.P.Sanders는 유대교라는 바울의 신앙배경이 사도로서 그가 가진 사상과 그가 한 활동에 끼친 영향을 실증해보이고 있다. 심지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한 역할을 살펴봐도 그가 품은 동기들과 생각들이 성경의 개념범주와 유대교의 그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들어 그는 자신이 사도로 임명받은 것을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에 비유한다(1:15, cf. 49:1). 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방인 선교사명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열방이 예배하러 오는 장면을 이야기하는 이사야서 본문에 비추어 이해했던 것 같다(15:21, cf. 52:21). 바울은 자신을 줄곧 유대인이라 규정하면서(9:1-5, 2:15), 인류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1:16, 9:24, 고전 1:22-25, 10:32). 이것이 유대인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유대인만 받을 수 있는 매질(고후 11:24)을 기꺼이 감내한 것은 바울이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하여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바울은 기독교 대다수 교파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겼던 다음 두가지 것을 하나로 묶어 힘써 주장했다:(1) 유대인의 민족 정체성과 "이스라엘"(유대인)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계속된다. (2)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해야 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얻게된다.


우선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유대인 동족과 아무 문제없이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할례와 토라준수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들에 맞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이방인들의 회심이 정당함을 변호할 경우에만 유대율법이 갖는 의미의 한계를 설정했다는 점(3:1-5:15, 3:9-4:24)을 늘유념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사람들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시다(10:4).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에 이르는 유효한 방편은 그리스도이시지, 토라가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믿음이나 신앙관행의 혁신처럼 보이는 것을 변호할 때조차도 유대의 종교전통을 분명하게 언급하며 변호하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살전 1:9은 신앙문제에 관한 유대인 특유의 시각을 확실하게 반영하고 있고, 3:28-29은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식탁교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런 의미를 부여하는 유대인 특유의 생각을 조롱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테렌스 도널드슨(Terence Donaldson)이 주장했듯이, 바울은 계시들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강타했던 강력한 신앙체험들의 영향으로 그가 품은 확신들과 개념 범주들을 "재구성"하는데, 이 확신들과 개념범주들은 거의 모두 그가 속한 유대교 배경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물론 바울은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지중해 세계 곳곳을 여행한 사람이었기에 당시의 보편적인 지적환경과 문화환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사상과 개념범주들(수사관행)을 폭넓게 보여준다. 이런 사상과 개념들 가운데에는 헬라철학의 전통들에서 유래한 것도 일부 있었다. 바울이 헬라 철학을 정식으로 공부했다거나 이 철학에 상당히 능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대의 독실한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진지하게 비교해보면 바울은 훨씬 더 초보적이고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헬라철학 전통들을 터득했던 것 같다. 헹엘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전통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학파들이 구사하던 문체와 그 본질이 달랐던 유대교 회당 설교를 염두에 둔 유대-헬라식 수사법의 기본지식"을 터득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바울을 플라톤 사상을 상당히 추종한 사상가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판단이요 증거가 부족하다.

바울서신이 확인하며 보여주는 그리스도-섬김의 실상을 올바로 인식하려면, 바울을 만들어낸 유대교 전승이 유일신론에 강조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이것의 의의는 첫째, 양심있는 유대인들은 로마시대 종교환경 속에 존재했던 다른 신들을 용납하고 이들에게 예배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그 측근들 중에서 모세나 에녹처럼 두드러져 보일 수도 있었던 높임을 받는 모든 존재들과 계속하여 구별하며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예배해야 함을 강조했다. 둘째, 유대교 유일신론 입장은 사람을 신으로 여겨 섬기는 인간 신격화를 금지했다. 이것을 우스꽝스럽고 신성모독이라 여겨 거부했다. 그러면 바울이 로마시대를 지배한 인간 신격화 개념으로 그리스도-섬김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견해는 설득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


2. 회심자 바울

바울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구별시켜주는 첫째 요인은 바울의 극적인 변화이다. 초기 기독교 운동을 핍박하는데 열심했던 이 "열심"(3:6, 1:14)이란 말은 고대 유대교 전승에서 공중에게 해를 입힌 악독한 죄를 범하다 붙잡힌 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혹독한 보응을 가한 비느하스를 설명하는 성경기사(25:5-13)와 결합하여 나타난다. 바울이 갈 1:13에서 사용하는 말들(핍박하고 잔해하고)은 단순히 말로 반박하는 차원을 넘어 결연하고 혹독한 행동들로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을 회심자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스텐달이 바울을 "확고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일컬었던 것을 보건대, 그가 쏟았던 신앙적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데 큰 힘을 쏟았으나 바울은 스스로 다메섹 사건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한 것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런 시걸이 제안했듯이 그 변화가 그렇게 중대한 변화였다면 '회심'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겠다.


바울은 회심자로서 그가 가진 신앙적 견해들을 철저해 재구성해야만 했다. 사실상 그의 신앙적 "자아" 전체를 완전히 바꿔야 했다. 이 과정에 바울은 기독교 운동 초창기 수십년 동안 다양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들에 관한 이해를 완성시켜갔다. 바울은 이러한 전통적 공식문구들을 언급한다(4:24-25, 고전 15:1-7, 살전 1:10).


3. 이방인 선교

바울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구별시켜주는 두 번째 요인은 이방인 선교이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따르고 지킬 사람들을 만들어낼 특별한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이라고 지칭한다(1:5, 11:13, 15:17-20). 그러면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이 특별한 직무를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의 직무와 비교한다(2:7-8). 더욱이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돌아서게 하신 목적이 바로 이 이방인 선교였다고 말하면서(1:15-16), 자신을 태어나기 전부터 이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그 "계시"가 있은 후에 얼마나 빨리 이방인들을 위한 그 특별한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울이 회심 직후에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든 아니면 회심하고나서 몇해가 흐르고 난 뒤에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든, 바울이 이방인을 회심케 하여 아브라함의 공동 상속인으로 완전히 편입된다는 말은 토라를 따르는 개종자를 만들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2:1-5, 11-18, 4:13-17). 또 성령이 부어주시는 능력을 좇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이방인 신자들의 윤리적 의무를 규정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5:6, 13-26). 허나 바울이 이 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는 사실은 그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 특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설복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믿음을 그가 받은 초기 기독교의 전승들 속에, 그리고 고전 15:1-11에서 언급하는 다른 유대계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공유하는 믿음들 속에 포함시킨다. 그러면서도 갈 3:1-29과 롬 3:9-31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전승에 자신이 성찰한 결과들을 제시하며 이방인 선교라는 특별한 사명이 낳은 바울의 기독론(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독특하였고 모두의 공감을 끌어내지는 못한듯 보이나 바울서신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들과 섬김의 실제들이 다른 측면에서도 이전의 기독교 전승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모습은 결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독론적 언어와 테마들

바울에게 예수가 신이자 섬김을 받을 분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주요 특징들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즉 신학자 바울을 논의하기보다 바울이 섬기는 교회들에 널리 나타났던 특징인 예수에 관한 믿음들을 살펴보겠다.


1.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마쉬아흐"의 헬라어 번역어로, 바울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도를 가장 빈번히 사용한다(150: 고전 15:3, 10:4). 그러면서도 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 등과 같이 다른 용어들과 다양하게 결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곧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전승과 그리스도인 집단들에 아주 확고하고 평범한 일상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타내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Christ Jesus)라는 표현(고전 4:15, 12:5, 16:3,7,9,10)을 사용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과 함께 쓴 것이 헬라어로 된 유대인의 성경을 읽는 고대 독자들에겐 또다른 기능을 발휘했을 것이다. 모세의 위대한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예수와 동명이인으로 읽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에 정관사를 넣은 "그 그리스도"(9:3,5)는 이방인 독자들이 이 칭호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 칭호와 관련된 유대교 전승을 어느정도 알고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곧 종말의 때에 하나님을 대리할 자로 하나님께 임명받은 존재인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말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약속된 부활의 첫열매시다(고전 15:20-23). 그리스도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왕과 메시아의 의미는 예수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는 바울의 언급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5:23-28). 따라서 1세기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는 생각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베르너 크라머(Werner Kramer)가 언급했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한 문장들도 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5:6, 14:9,15, 고전 5:7, 8:11, 15:20, 2:21, 3:13). 이 표현들 속에서 그리스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메시아의 사역으로서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예수가 "우리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서신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상당기간동안 초기 기독교 신앙이 강조한 주장들 가운데 확고한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고전 15:1-11에 강조하듯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15:3-4)은 바울 및 예루살렘과 연결된 다른 인물들이 공유한 믿음들 가운데 일부였다(15:11).


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바울이 쓴 서신이라는 데 논란이 없는 일곱 개 서신에서 예수를 단 열다섯번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나머지 바울 서신에서는 이 말이 단 두 번 더 등장할 뿐이다. 칭호로서 "하나님의 아들"은 단 세 번만 등장할 뿐이며(1:4, 고후 1:19, 2:20; 4:13까지 포함한다면 네 번), 이 말을 가리키는 헬라어 표현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크라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대목이 이처럼 드물다는 점에 주목하여 바울의 기독론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그릇된 결론을 내렸다. 반면 부세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테마가 바울이 가진 믿음들 가운데 중심이라고 보았는데, 바울이 이방종교 환경에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범주를 받아들였고 이것을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예수가 신의 지위에 있음을 전달하고 예수예배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사용했다고 강조했다. 불트만과 쇱스(Schoeps)도 이 견해를 받아들였는데, (Nock)과 헹엘은 이방종교가 언급하는 신의 아들 개념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며, 인류를 제우스나 다른 높은 신들의 자녀라 언급하는 대목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바울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과 연관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설령 황제섬김이 초기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그것은 바울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었으며, 그 경우에도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배척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녹(Arthur D. Nock)에 의하면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은 것을 더 넓게 헬레니즘 세계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1세기 초 그리스도인 집단들의 성경과 유대교 전승에서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개념범주였다. 구약성에에서도 하늘에 있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고 있다(6:2-4, 32:8, 1:6, 2:1, 29:1, 89:6). 다윗의 자손인 왕(the Davidic king)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맏아들"로 언급했고(삼하 7:14, 2:7, 89:26-27), 이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의인들('솔로몬의 지혜' 2:18, 5:5, '집회서' 4:10, '솔로몬의 시편' 13:9, 18:4)과 이스라엘 전체(4:22, 14:1, 1:2, 3:22, 1:10, 11:1, '솔로몬의 지혜' 12:21, 16:10,26, 18:4,13)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맏아들"로 언급한다. 쿰란 사본 본문들에서 유대교의 왕과 메시아를 가리키는 수사중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범주는 초창기 기독교의 모체인 유대교와 가까이 있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열다섯번 언급하는데, 그중 열한번이 로마서(일곱번)와 갈라디아서(네번)에 있다. 반면 고전 8-10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로마세계의 많은 신들을 예배하는 경우와 대조하는데 여기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대목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범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예수가 왕의 지위를 갖고 계시며 왕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시사한다. 1:3-4절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다윗의 씨"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삼하 7:12에서 다윗에게 "네 씨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 롬 1:4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음은 삼하 7:14의 약속과 시 2:7에 왕으로 등극한 다윗자손인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것과 연결된다. 또한 살전 1:10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그의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해낼 자로 하나님께 임명받은 그의 종말론적 역할과 연관지어 언급한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우상들"을 대조하는 것은 유대교의 신앙관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전 15:24-28에서도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묘사하면서 시 110:18:7(6)을 넌지시 시사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갖는 지위의 초월적 본질과 전 우주를 아우르는 범위는 어쩌면 '에녹1' 37-71장이 말하는 "택함받는 자"를 참고할 경우에만 비로소 접근 가능할 것이다. 바울의 왕-메시아 전승에서 유래한 모티프는 모두 예수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높은 보좌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믿음을 담대히 표현할 목적으로 바울이 유대교 전승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메시아가 치욕스러운 죽음에서 부활함으로써 메시아로 임명받는다는 개념은 그 선례가 없다. 바울은 세 본문에서 예수를 하나님이 구속적 죽음에 내어주신 아들, 또는 스스로 자신을 이런 죽음에 내어주신 아들이라 일컫는다. 8:32에 나오는 "내주셨다"는 동사는 4:24-25에서 반복되고 1:24-28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할 때도 사용한다. 5:6-10에서 예수를 그리스도(6,8)와 하나님의 아들(10)이라 일컫는데 특히 10절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구속행위로 제시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2:20에서도 "내주셨다"는 동사를 사용하면서 이 문맥(2:15-21)에서 일곱 번 더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이 구절에서 사용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 사랑과 자기 희생 때문에 찬미받고 계신 분(예수 그리스도)의 위업과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지칭할 때는 일관되게 정관사를 사용함으로 예수가 ""생자("the" Son)라는 유일무이한 지위에 계심을 시사하고 이 예수를 당대 유대교 자료들과 이방종교의 자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컫던 다른 이들(천사, 의인, 위인, 이적 행하는 자)과 구별한다는 점을 유념하는게 중요하다. 4:5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고 말한다. 4:6-7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업을 받을 자로 지칭하면서 이 신자들이 "아들의 영을" 받았고 그 아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말한다. 로마서 8장에서도 바울은 신자들이 갖고 있는 아들의 지위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과 연계한다(3,5-13,14,15,18-27,19,21,23,28-30). 고전 1:9은 신자들을 하나님이 불러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시는 이들"로 묘사한다. 고후 1:19-20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보장되고 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신자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멘"으로 응답한다.


학자들은 보통 바울이 롬 1:3-4과 살전 1:10에서 바울서신이 기록되기 여러해 전에 나온 전통적 신앙고백 공식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것을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아들 개념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신의 아들 개념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부분이 드문 것은 그가 그의 회심자들이 불트만처럼 예수를 신 같은 영웅이나 신에 준하는 존재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듯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다른 기독론 개념만큼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바울이 유대교 및 성경전승의 관점에서 예수가 갖는 중요성을 전달하는데 유용함을 발견했다는 징표다. 다메섹 사건을 표현할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신 것(1:16)이라고 표현하고 더욱이 바울은 자신의 선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으로 규정하며(고후 1:19), 그 자신의 섬기는 태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사는 것으로 묘사한다(2:20).


3. 주이신 예수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바울서신에 180번정도 사용한다. 로마시대 헬라어에서 퀴리오스는 노예가 주인을 부를 때, 상대방을 공손하게 일컬을 때, 여러 신들에게 공경하는 뜻을 붙이는 별칭이기도 했고, 로마 황제에게 사용하기도 했으며 어떤 우월한 지위와 힘 내지 권위를 지닌다는 기본개념이 깔려있었다. 유대적 전승에서 본다면 1) 하나님을 언급할 때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주라 부르는 것이 신앙관행이었고 2) 헬라어로 말하던 유대인들은 이 퀴리오스라는 말 자체를 신앙용어로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보다 히브리어 '아도나이' 또는 아람어 '마르야'로 부르는 관행이 있었다. 실제로 기독교 운동 초창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 집단과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 집단에서는 예수를 ""라 부르는 관행이 있었는데 고전 16:22에서 "마라나타" 라는 문구를 사용하며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데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8:15과 갈 4:6에서 이 마라나타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익숙한 "아바"를 가르쳤음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상황은 아람어를 사용하던 유대/팔레스타인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하게 주로 섬기는 섬김패턴이 헬라어를 사용하던 바울의 교회들에서도 장려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바울 기독교가 기독론과 관련지어 퀴리오스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이 관행은 아람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 집단들의 섬김생활에서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순히 전해 내려온 어떤 용어가 아니라, 공유된 경건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하나님을 퀴리오스로 부르는 본문들은 구약 본문을 인용한 곳이다(4:8, 32:1-2 / 9:28-29, 28:22, 1:9 / 10:16, 53:1 / 11:34, 40:13 / 15:11, 117:1 / 고전 3:20, 94:11 / 고후 6:17-18, 52:11, 삼하 7:14).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나오지 않더라도 바울의 언어로 주라 지칭하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다(11:3, 왕상 19:10 / 12:19, 32:35 / 고전 14:21 28:11). 때로는 바울이 구약의 본문을 예수에게 적용하면서 예수를 퀴리오스라 부르기도 하였고(10:13, 2:32 / 고전 1:31, 9:23-24 / 고전 10:26, 24:1 / 고후 10:17, 9:23-24) 다른 두 곳에서는 바울이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본문을 하나님께 적용한 것인지 예수께 적용한 것인지 확정하기가 어렵다(14:11, 45:23 / 고전 2:16, 40:13). 또한 바울이 야웨를 퀴리오스로 언급한 구약본문을 시사하며 예수를 그 퀴리오스라는 칭호의 적용대상으로 분명하게 밝히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고전 10:21, 1:7,12 / 고전 10:22, 32:21 / 고후 3:16, 34:34 / 살전 3:13, 14:5 / 살전 4:6, 94:2 / 2:10-11, 45:23-25).


결국 바울서신에는 독특하게 예수를 퀴리오스라 일컫는 세 가지 유형의 문맥들이 있다

(1) 권면을 담은 말과 본문에서 예수가 주/스승으로서 그의 가르침과 본보기는 신자들에게 권위를 갖는다

(2) 종말의 때를 내다보는 소망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다시 오실 주로 규정한다

(3) 예배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을 반영하는 공식문구들과 본문들에서는 퀴리오스라는 말이 하나님이 예수에게 부여하신, 모든 이보다 뛰어난 지위를 가리키는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인 집단들이 실제 예배 행위에서 예수에게 부여했던 독특한 칭호를 가리킨다.


분명히 "그리스도", "", "아들"은 각기 그 나름대로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정의한 말들을 거침없이 한데 묶으며("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주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 똑같은 문맥에서 둘 이상의 칭호들을 사용하기도 한다(2:17-21: "그리스도""아들", 14:5-9: """그리스도"). 이것은 초기 수십년동안 신자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여러 의미들 사이에 풍성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래리 허타도 "주 예수 그리스도" pp.16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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