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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육 3 - 사춘기 청소년를 둔 부모에게 전하는 한마디 : 청소년 인성교육을 위한 제안
고민하지 않으면 아이가 죽는다
우리의 부모들은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다. 멀리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라는 남북의 뼈아픈 시간들을 거쳐왔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다. 그 분들의 인식 속에는 늘 배고픔을 이겨낼 방법, 안락한 집을 마련할 방법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스레 모든 관심과 생각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 방향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러한 욕구에 의해 오늘날의 이 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병폐도 없지 않아 있다.
빠르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이 변하다 보니 내적인 요소들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직도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인재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생각이 자라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이 자라나지 못한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몇 몇의 정신적 미숙아들에 의해 안타까운 인생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때에 부모세대는 다음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매의 눈으로 관찰하고 고민해야 한다. 부모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오히려 아이만도 못한 분들을 만나기도 한다. 자신의 잘못과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커녕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분노를 표출하는 부모도 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잘 모이는 장소가 있다. 놀이터는 기본이고 열려있는 아파트 옥상이나 상가 옥상을 좋아한다. 소방법상 옥상을 잠가놓지 못하게 되어있기에 아이들이 법을 알고 간 것 같지는 않고 모여서 놀 곳은 필요한데 마땅히 갈 곳은 없고 돈도 없다보니 열려있는 공간을 찾다가 옥상에 오게 된 것이다. 사무실에 있는데 선생님 한 분이 뛰어오면서 빨리 옥상을 가봐야 한다고 다급히 말한다. 그 전부터 아이들이 옥상에서 술판을 벌이고 떠드는 일이 있었다. 현장에 가면 언제 도망쳤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무엇을 말하는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과연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상가의 한 쪽 문을 잠가두고 다른 문으로 가보았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음주를 하며 자리까지 깔고 신나게 떠들며 놀고 있었다. 술병은 여기 저기 굴러다니고 담배꽁초가 널려있다. 자기들이 해보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해보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더욱 놀란 것은 상가 건물 옥상의 밀폐된 공간에서 불을 피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이 탈출구로 보아두었던 반대쪽 문으로 달려갔다. 잠겨있으니 도망갈 수가 없었다. 거세게 반항을 했다. 설득이 되지 않았다.
“아, 씨팔 뭐야. 왜 그러는 건데.”
“아저씨들 뭐에요. 우리 갈거란 말이에요.” 여자 아이가 앙칼지게 말한다.
남자 아이들은 눈을 사납게 뜨고 한 대라도 칠 듯한 기세다.
경찰들이 오고 함께 파출소로 갔다. 부모들이 왔는데 어떤 부모는 잘못했다고 선처 해달라 한다. 어떤 부모는 자기 자식은 잘 못한 것이 없단다. 친구들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한다. 오히려 역정을 내고 분노를 폭발시킨다. 부모를 보니 아이를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시각을 달리하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다시 말하면, 문제가 생겨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그 문제만을 해결하려하는 방식의 사고는 버려야 한다. 물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해야 한다. 좌우상하를 살펴 그에 합당한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이제는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보여주었던 좋은 모습들 많이 있다. 그러나 채워주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음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부모세대가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들을 손수 보여주어야 한다. 먹고 살만하지 않은가? 아니 먹고 살만하지 않더라도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기 위해,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를 만들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아이들의 눈은 늘 부모를 주시하고 있다. 안보는 척하며, 안듣는 척하며 모두 보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이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당장에 “엄마, 아빠도 그랬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했잖아요.”라고 단박에 들고 나온단 말이다. 그럴 때 마다 궁색한 변명으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넘어가지 않나. ‘앗 차!’하는 생각에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라는 고민은 아무리 일찍 서둘러서 해도 늦지 않다. 일관적인 교육관이 필요하다. 먼저는 올바른 인간이해의 기본적인 틀이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는 한 올바른 교육관이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또 다시 역사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인재’로 인한 재앙이 덮쳐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모 된 우리 모두는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기를 소망하고 있다. 늘 부족한 부분, 안타까운 부분이 눈에 보이다 보니 무엇인가를 해 주려들고 그러다보니 헬리콥터맘이니 하는 용어들이 생겨난다.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은 부모가 영원히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 든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절절히 깨닫도록 해주어야 한다. 나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은 때가 되면 안다.
지금은 미울지 몰라도 언제인가는 알게 될 그것들. 엄마 아빠의 사랑이 그리울 그 때가 되면 부모님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하듯 우리의 아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지금은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자기 세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그렇게 살아가리라.
아이들 앞에서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일부러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마음에 있는 것이 삶 가운데 드러나기 마련이다. 행동 속에 수많은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가? 행동을 말없는 언어라 하지 않는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빠가 엄마를 자연스럽게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빠가 엄마에게 뽀뽀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과연 그 가정의 모습이 삭막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빠의 강직한 모습, 주어진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의 아이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식 속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아빠의 모습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엄마가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해 준다고 생각해 보자. 아침을 먹지 않고 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침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먹게 하고 사랑이 담긴 식사를 준비한다면 그 또한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언젠가는 그 모습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나의 아내는 오늘도 아이들을 위해 여전히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누가 그러더라. “요즘은 아침을 먹고 나라가려는 남편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맞벌이 부부들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러나 저러나 좋다. 남편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면 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아빠들이 아침을 준비한다면 아이들은 이게 웬일인가 할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 아이를 사랑할 것인가?
사랑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불화가 있을 수 없다. 아픔이 아주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아픔마저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사춘기의 정점을 찍고 있는 중2 아이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해 언제 눈물을 흘려 보았는가? 엄마들은 종종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면 아빠들은 어떠한가? 남자는 태어나서 3번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인가? 아빠들이여 사랑해서 기뻐서 눈물을 흘려보자. 그 한 방으로 아이들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남자의 눈물은 더 진하다고 한다. 안 나오는 눈물 억지로 짜낼 수 없지만 그 만큼 감정표현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남성들이 잘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감정표현이 아니던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표현해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말하지 않으면 표현하지 않으면 그 맘을 알 길이 없다.
우리 부모 세대의 자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우리가 경험해 보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더욱 업그레이드 된 사랑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중2 아이들이 그 사랑을 모를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아이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것이냐다. 여기에 승부수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결핍으로 혹은 과도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아이들이 죽을 수 있다. 이제 부모 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엄마 아빠가 생각을 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인생을 살거나 그 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를 만들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