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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사랑하는 사람

시편 122:1-9

 

본시는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시온에 안치된 사실에 대해 커다란 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성소가 예루살렘으로 확정되었음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처소로서의 시온를 찬미하였습니댜.

이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 성전은 기쁨의 장소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이 만나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왕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배도함으로 예루살렘 성은 결국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사라지고 맙니다. 기쁨의 장소가 슬픔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안과 화해가 넘치던 장소가 불화하고 전쟁이 빈번한 갈등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참된 성전의 의미를 되새기며 예배의 회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저런 갈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갈등까지도 줄여 나가기 위하여 힘쓰고 애를 써야 할 것이지만 여러분이 땅에 있는 동안 아무런 갈등이 없는 완벽한 교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교회는 그런 갈등을 통하여 온전해지고 발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런 저런 갈등으로 인하여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러분,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이와 같은 사실을 감사드리며 이와 같은 아름다운 전통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지켜나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교회를 보다 더 좋은 교회로 성장시켜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시편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 는 표제가 붙어있는 시편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사람들 이 성전이 좋아서 그리고 올라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서로 성전에 올라 가자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감사한 마음을 오늘 본문과 같은 시편으로 찬송하였던 것입니다.(1-5)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 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 가는도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다윗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자신과 사람들에게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임 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축복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6-9)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 중요한 축복의 기관인 교회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며 그에게 먼저 그리고 가장 큰 축복을 주실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축복 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면 큰 복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산위에교회를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과 같은 교회로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여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교 회, 교인들을 축복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자자손손 교인들을 축복 하는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뜨겁고 아름다운 예배가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예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생명도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가 죽으면 교회가 죽고 예배가 죽으면 신앙이 죽습니다. 교회의 생명과 우리 신앙의 생명은 예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아름다워지도록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뜨거워질 수 있도록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뜨거워지고 감동적이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예배를 사모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고 노력하셔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첫째, 일보다 예배를 중히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10:38-42) 봉사하고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일보다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산위에교회를 참으로 계속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는 마리아가 먼저 되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봉사하고 일하는 것이 앞서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물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후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지만 일이 말씀과 예배를 앞서서는 안됩니다.

사탄이 열심 있는 교인들에 게 쓰는 전략 중에 하나가 바로 예배 보다 일에 더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탄의 전략에 가장 먼저 빠지는 사람이 바로 목사와 장로 같은 중직자들 입니다. 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들이 주어집니다. 그 일을 잘하려고 하다보면 일에 빠져서 예배가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보면 마음에 갈등과 상처가 생기는 수가 있는데 이 갈등과 상처가 예배를 방해합니다.

특히 일을 하다보면 목회자와 갈등 이 생기는 수가 많은데 그 갈등이 예배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일이 예배에 영향을 미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예배가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여야만 합니다. 모든 중직자들은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직자들이 이와 같은 사탄의 전략에 넘어가 예배보다 일을 앞세우게 되고 일 때문에 상처를 받아 예배를 놓치게 되면 교회는 절대로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중직 자들은 일보다 예배를 중히 여겨 교 인들에게 예배하는데 모범이 되실 수 있기를 위하여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직자들의 예배 분위기와 자세가 교회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독교에 맞지 않은 의식과 전통을 탈피하여야만 합니다. 교회의 예배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가 깊이 그리고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유교적 문화와 전통에 관한 것입니다.

유교는 우리 문화에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교입니다. 유교에는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교적인 전통과 문화 중에 우리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죽은 조상에게 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 상을 위하는 것 까지는 좋으나 그것이 신격화되어 우상화되게 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흔들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 때문에 순교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핏값을 치루고 난 후에야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심을 믿는 기독교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 기독교 신앙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교의 지나친 체면 문화입니다. 유교에는 체면과 권위가 중요한 덕 중 에 하나입니다. 물론 체면과 권위는 어느 면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을 반듯하게 하고 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교적인 문화와 전통이 예배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젊잖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젊잖다'는 말은 유교적인 문화를 대표하는 말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을 반듯하게 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말이요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할 때 '젊잖음 '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를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젊잖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건방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다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나아와 젊잔을 떤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지은 시인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께 제사할 때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양 할 때 기뻐서 아이같이 춤을 추었습니다.(삼하6:11-15)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서 춤을 출수 있는 마음이 예배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과 삶속에 깊이 뿌리고 내리고 있는 체면 문화가 그 예배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책 중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예배에 있어서 그 말처럼 옳은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공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예배가 삽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교인들이 삽니다. 전통적인 한국 교회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유교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상투를 틀고 가부좌를 하고 근엄하게 예배를 드려야만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시끄럽고 요란한 서양문화와 젊은이들 문화가 예배에 맞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예배가 치우쳐서 젊은이 위주로 가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아직도 뿌리 깊이 내리고 있는 유교적인 문화와 전통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비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자와 부처가 교회 안에 있으면 교회는 교회다워지지 않습니다. 예배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특히 예배 안에 있는 공자와 부처를 교회 밖으로 내몰아야 예배가 살고 교회가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를 질문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3-24)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산위에교회를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교회로 만들어가고 세워가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먼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들을 아무리 잘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감격과 감동이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교회를 어떻게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은 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그 말씀의 증인입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다가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산위에교회를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고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먼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그 아름다운 예배를 통하여 우리 산위에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교회, 은혜가 충만한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과 같은 복된 성전이 될 것 입니다.

아름다운 예배를 통하여 우리 후배들과 자손들에게 아름답고 복된 성전을 물려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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