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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자손이 되기 위하여

19:1-10

 

 

옛말에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맺은 사람이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의미로서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은 반드시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을 저질러 놓고 그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며 또한 쉽게 용서를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용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결과에 대한 책임과 적절한 보상을 요구합니다. 흔히들 미안하다, 그만 두자, 없었던 일로 하자는 등의 말로 자기의 잘못을 무마시키려고 하지만 이는 기회주의적인 발상이요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야기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삭개오는 모름지기 진정한 제자의 삶이란 결과를 책임질 줄 아는 즉, 진정한 회개를 할 줄 아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구원사건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의 핵심인 구원을 요약할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서 누가복음 전체의 주제를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해오셨던 사역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삶입니다.(4:48, 5:32)

더욱이 예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가장 분명하게 가시화하고 구체화한 것은 예수님과 세리들과 죄인들 사이의 식탁교제입니다.(5:30, 7:35, 15:1-2)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삭개오의 사건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의미를 요약적으로 제시한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삭개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부자청년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19:16-22, 18:18-23) 부자 청년의 기록이 어린아이를 본받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삭개오의 사건은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나라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부자였다는 점에서는 부자 청년과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 청년과는 달리 세리장이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증오하고 미워했는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갑니다.(2)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둘러선 무리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불평을 했습니다.(7)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식탁교제를 할 때 예수님께 불평을 했던 사람들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일반 백성들마저 예수님께 불평하는 모습을 볼 때,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삭개오의 관심사는 여리고를 지나가는 예수님을 한 번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3)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여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키가 너무 작아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을 볼때 그의 욕망이 얼마나 간절했나를 말해줍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리라고 예상되는 길로 달려가서 뽕나무(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4) 그의 최대의 소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3) 예수님을 한 번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시면서 나무 위에 있는 자기를 주목하지 않고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그의 목적은 성취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 고상한 목적, 즉 구원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욕망이 설사 있었다고 할지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를 지옥에 제일 먼저 갈 죄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구원해 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놀랍게도 삭개오의 기대와 생각을 초월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가 올라가 있는 나무 바로 밑에 오셔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집에 머물겠으니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단순히 저녁이 되었기 때문에 기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표시였습니다. 삭개오는 이 말의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을 뿐만아니라 둘러선 모든 무리들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7)

9절에 언급하듯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신 것은 그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와 그 가정에 구원의 축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의 집을 방문하신 것은 그 축복을 가져다주는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삭개오는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아직 예수님께 회개와 관련된 한마디 말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나무위에서 예수님을 믿겠다는 고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이러한 단계에 조차 도달하지 않은 삭개오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고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제공하는 구원의 성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대면하실 때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더러운 부자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영접하신 것이야말로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나 의로 되지 아니하고 /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채 종이라도 되려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무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나타난 것과 같이(15:20-24)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과 사랑이 예수님이 삭개오를 영접하신 사건 속에 분명하게 구체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엄청난 구원의 선물은 삭개오의 생각과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이미 놀랍게 바뀌었기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해서 꿈에도 그려볼 수 없었던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게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을 값없이 받으니 이로 인해 재물에 대한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또한 사람들의 것을 강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 그의 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8) 부자청년이 이렇게 할 것을 요구 받았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을 삭개오는 구원의 감격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떼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쳐온 말씀인데 삭개오는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꺼이 재물을 나누어주는 삭개오의 변화된 행동은 초대교회가 성령의 선물을 받고 모든 재산을 성도들 사이에 공유함으로 그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없었던 사건을 예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삭개오의 변화된 행동을 통해서, 변화를 받아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아니라 / 구원의 체험을 통해서 행동의 변화 / 특별히, 재물에 대한 태도의 변호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성도들의 모든 변화의 원인이요, 동인이요, 모체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께서 조건없이 먼저 영접해주신 사람 중에서 나중에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세리 마태와 다른 세리들의 변화(5) 악명 높은 죄많은 여인의 변화(7) 많은 귀신들렸던 청년의 변화(8) 등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구원받을 자격을 구비한 사람만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수용적이고 개방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했을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구원관에 대해 도전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구원을 잘못 이해했다는 증거는 죄인들과 예수님의 식탁교제를 비난하고 죄에 대한 용서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돌렸다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5:21, 7:48-49) 그들은 구원을 선물로 받으려고 했던 자들이 아니라 / 그들의 자격으로 획득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구원이 멀어졌고 그 결과로 그들의 삶에는 예수님과 계속적인 접촉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온 것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시 오늘의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은 생활수준,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말미암아 삶의 질과 인격의 질이 더 나아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 자비하심의 결정체인 예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구원을 겸허하게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자격론에 근거하여 획득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사람과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분류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지지 못한 자, 배우지 못한 자가 푸대접을 받는 이유가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교회는 / 예수를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결론. 10절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영접하신 일과 그로 인한 변화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본질입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천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둘러싼 무리들에게 그의 사명이 삭개오와 같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식을 구원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각 도시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각종 질병을 고치며 귀신들을 축출한 것은 이 사명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동일한 열정으로 삭개오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들에게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역시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 그들을 구원시켜야 할 것입니다.

 

삭개오의 사건을 통해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사실은, 구원이 지금, 현재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주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구원이 나중에 주어질 미래적인 실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현장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등한히 하고서 종말적인 미래에 가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 하셨던 것과 같은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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