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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 쟁

[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1. 백년전쟁이란 무엇인가?

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

프랑스를 전장(戰場)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다.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2. 백년전쟁의 문화인류학적 의미

백년전쟁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두집단의 변화

 

1) 봉건 제도의 몰락과 중앙집권화의 시작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이제는 영국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 간에 걸친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간에 장미 전쟁(1455~ 1485)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이었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전쟁은 양 가문 및 그들에게 합류한 귀족들 자신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만큼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략결혼을 통해 장미전쟁을 수습한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기초을 두 나라의 중앙집권 체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는 서양 봉건제도가 시작된 발원지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였다는 점에서 특히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이 부분은 화약 무기의 등장도 일조를 하였다), 농노 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영국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존재한 의회제도 덕분에 귀족 영주와 국왕의 대립 구도에서 의회와 국왕의 대립 구도로 바뀌고 권력이 분산되어 19세기에 최초의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 반면, 프랑스는 전쟁 와중에 강력해진 상비군 덕분에 국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상황의 상징은 삼부회다. 삼부회도 영국의 의회처럼 전쟁 비용 징수에 대해 범계층의 동의를 통해 징수할 의도로 설립되었으나, 상비군 체제와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름만 있고 더 이상 개최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부회가 열린 것은 17세기였고, 루이 14세 이후 한번도 개최되지 않았던 것이다.(다시 열린 것은 1789년이었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2)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형성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이민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프랑스 역시 잔 다르크로 상징되는 프랑스 인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사실상 그 이전에는 "영국인(잉글랜드인)"이나 "프랑스 인"이라는 국민의식 같은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이라는 국민감정은 이때 영국인에 대한 증오의식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후에 프랑스와 영국은 개와 고양이 같은 관계가 되었고, 두 나라가 손을 잡게 되는 것은 1854년 크림 전쟁이 사실상 처음이었고, 독일이 제2제국을 세운 이후 두 나라는 동맹국 사이가 되었으나 여전히 민족감정은 남아있다. 유럽연합을 비롯한 두 나라의 외교정책에도 이 감정은 여전히 살아있다.

  

 

AD 1338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로 일어난 백년 전쟁.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의 왕위계승과 영토 지배권이 문제였습니다. 영국이 우세했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하게 되죠. 이로써 프랑스는 전 국토가 통일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됩니다. 이 전의 프랑스는 왕권이 약했고 여러 장원으로 분리된 중앙 분권 체제였습니다. 하지만 교황권이 약화되고 봉건 영주의 힘도 약해진데다가, 도시가 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왕권이 강력해졋고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죠. 하지만 영국은 아직도 봉건 영주와 기사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그 덕에 중앙 집권 체제의 형성이 어려웠죠. 하지만 장미 전쟁(1455~1485)로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사이에 왕위 계승 문제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랭커스터 가의 헨리 7세와 요크 가의 엘리자베스의 결혼으로 인하여 전쟁은 종결되었죠. 이로써 기사의 세력이 몰락한 영국도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게됩니다.

 

정리- 백년 전쟁으로 프랑스는 국토가 통일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됩니다. 영국도 후에 장미 전쟁을 겪으면서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3. 전쟁의 결과 및 의의

1) 영토의 통일 - 프랑스 내에서 영국 국왕의 토지가 사라졌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 국왕이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내 영토는 칼레에 불과하게 되엇다 .

2) 민족 의식의 성장 - 영국군이 점령한 지역에 사는 프랑스인들에게 영국군은 약탈자이며 거만을 떠는 이방인들로 비쳐졌고 , 이런 사람을 새로운 영주로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 이들에 대한 저항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일종의 민족의식을 동반할 수 밖에 없었고 , 모든 저항은 프랑스와 국왕을 위한 것이었다 .

- 잔 다르크는 국왕과 프랑스를 위해 싸웠고 , 그 이후에 이러한 생각은 확산되어 영국군과 벌이는 모든 전투와 저항은 바로 '국왕을 살리기 위해 ''국왕 만세 '를 외치며 싸우는 것이 되었다 .

3) 전술의 변화

* 기사의 몰락 -기사도로 무장한 기사 군대의 비효율성과 그에 따른 기사 군대의 몰락 .

* 상비군의 등장 -전쟁 말기에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은 종종 도적떼로 변하곤 햇다 . 이러한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1445년 칙령을 통해 12개 부대의 상비군을 창설햇다 .

- 이러한 상비군의 탄생이야말로 신속히 이용할 수 잇는 무력을 국왕만이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엇다 .

* 대포의 사용 - 중세의 전투에서 주요 전술은 농성이엇다 . 그러나 대포가 등장함으로써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것만으로는 적의전진을 막아 낼 수 없게 되엇다 . 물론 초기의 대포란 발사 각도를 높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동성 면에서는 거의무용지물이었다 . 따라서 대포는 성의 포위 공격에만 사용되엇다 . , 성을 포위한 공격군은 성문을 중심으로 대포를 반원형으로 배치시켜 성문을 깨부수는 전술을 구사했다 .


 

4. 제도의 확립

1) 조세 제도의 확립 - 14세기 이전가지 프랑스에서는 신민 전체에 항구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살아가야 했다 . 전쟁이 시작되자 국왕은 왕국을 방어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모든 신민이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 처음 세금이 징수 되엇을 때에는 그 기간을 1년으로 한정하였으나 전쟁이 끝나지 않음에 따라 세금은 계속 연장되었다 . 빈번한 세금의 연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엇다 .

- 14 세기 말에 이르러 국왕이 ' 그 자신의 뜻에 따라 '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동안 ' 그의 신민에게 과세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 되엇다 .

2) 관료의 등장 - 세금은 세 신분의 대표회의라고 할 수 있는 '삼부회 '에서 결정되었는데 . 삼부회는 과세를 인정해 주는 대신 세금의 징수를 국왕 관료에게 맡기지 않고 삼부회에서 선출한 사람들에게 맡겻다 .

- , 세 신분에서 각각 세명씩 선출된 9명의 총징세관이 징수된 모든 세금을 관리하며 각 교구마다 2명의 징세원을 선출하여 이들로 하여금 징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했다 .

- 징수원이라는 이들의 직위는 1년에 한정된 것이엇으나 세금이 갱신되면서 이들의 직위 역시 연임되었다 . 그리하여 조세가 항구화의 길로 접어들었던 14세기 말부터 징세원은 일종의 관료가 되었고 실제로 국왕이 임명하곤 햇다 .

 

< 근대적 요소들의 등장 >

봉건적 토지 보유 , 주종관계에 근거한 기사 군대 ,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전술 , 그리고 지방 분권 체제 등이 사라지고 뚜렷해진 영토의 경계 .

용병으로 이루어진 상비군 , 조세 제도의 확립 , 관료제의 등장 , 민족 의식의 성장 등 중앙집권적 국가의 특징들이 전쟁을 통해 나타났다 .

- 영국은 대륙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섬나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갓고

- 프랑스는 백년전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거대하고 막강한 절대왕정 국가로 나아갔다 .

  

 

5. 백년전쟁의 의의

백년전쟁은 영국의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기억에는 찬란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초오서가 쓴 켄터베리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14세기 영국의 모든 계급의 실태를 짐작할 수가 있다.

 

직조 업자와 염색업자들은 부를 손에 넣었다. 그들의 처는 왕비에 못지 않은 외투를 입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인 자랑삼고 있었던 것은 자유였다. 1470년 오만한 포테스큐는 영국의 법률에 대하여 전 계급의 동의를 얻어 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주의 판단 하나로 유죄가 결정되는 식의 프랑스 인의 속박을 대조하고 있다. 리처드 3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지만 샤를 7세는 삼부회의를 소집하지 않은 해 세액을 결정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첫째, 프랑스 왕들의 통치는 영국 왕들의 그것보다도 훨씬 곤란했기 때문이다. 영국 왕들은 노르만 정복이래 전국토의 주인이었으나 프랑스 왕은 봉건시대 영주의 독립과 외적의 침입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었다는 것, 둘째로 영국에서는 개인 자신이 병사였으나 프랑스 왕은 최강인 포병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촌락에는 민병대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은 삼부회의도 소집하지 않도록 애썼다는 것, 영국에 있어서는 폭력이 봉건영주에게만 한한 속성은 아니었고,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폭력은 내부에 숨어서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세에는 폭력이 기사도적 예절과 종교적 자비라는 두 가지 힘으로 완화되었으나 15세기에는 예절과 자비도 결구 무너져 결혼은 상거래처럼 취급되었다.

 

당시 여자의 지위는 오늘날보다 훨씬 좋았다. 유명한 패스튼의 서한집과 초서의 켄터베리 순레기에는 국왕이 특별학교를 이튼과 윈체스터에 설립했다고 쓰여져 있다. 이 책에서는 일반남녀의 교양수준이 비교적 높았다고 나와있다.

 

백년전쟁 결과 중 하나는 프랑스 문학이 적국의 문학이 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초오서는 당시 영국의 생기 있는 현실사회를 광범위하게 묘사할 수 있도록 완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는 생활양식도 우리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15세기 이후에는 기사와 대 상인은 농촌의 별장을 가지기를 원하게 되었다. 뜰 안의 길에는 머리치장을 한 귀부인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가운데 중산 계급의 주거까지도 아직은 구태의연한 오두막집들이었다. 15세기에는 라틴어 명작의 번역서 등을 요구했다

   

백년전쟁이 일어날때의 프랑스에서는 국민감정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즉 예술, 관습, 언어에 있어, 비로소 프랑스인 고유의 특징이 명료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때 프랑스 왕국과 영국 왕국간의 길고긴 전쟁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백년전쟁이라 불리우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프랑스와 영국 두나라 모두에게 엄청난 역사적 충격을 가져다주며 그 결말을 보게 되는 전쟁이다. 이 중대한 사건인 백년 전쟁을 그 역사적 배경에서 그 영향까지를 쓰려고 한다.

  

그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피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복잡한 봉건적 상소제도가 많은 사람의 운명과 지역을 혼란속으로 빠뜨리고 있었기때문이다. 즉 반은 프랑스인이라고 할수 있는 영국왕은 프랑스왕이 자신의 왕국을 통일하는데 필요한 가스꼬뉴 지방과 귀이엔 지방을 합법적으로 영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프랑스왕 역시 스코틀랜드를 지원함으로써 영국이 대브리튼 섬의 안정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스코틀랜드의 평정을 방해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가지 일은 양립할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어떤하나도 한 나라의 주권을 방해하는 것 들이기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대단한 방해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일부 역사서에는 이 백년전쟁의 원인을 전자의 촛점을 맞추어서,필립 4세의 외손이 되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왕위에 입후보했기때문이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지 이번 리포트를 쓰면서 그러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에드워드 3세 역시 왕위 계승권을 가졌으나, 자신의 권리를 관철시키기위해 전쟁까지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프랑스사에 나온 부분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시말해 프랑스사에서는 프랑스왕으로 필립 드 봐라가 선정 되었을때,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의 영지-가스꼬뉴-관계로 신하의 예를 바치기위해 아미엥으로 왔다는 점이 기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하의 예를 바칠때 에드워드가 왕관을 쓰고 금으로 수놓은 벨벳장의만을 입어 봉건적인 관례를 깨뜨렸으나, 필립은 약한 항의만으로 만족하고 에드워드는 그에게 보여준 존대에 만족한 채 영국으로 돌아 갔다는 것이 기술 되어있다. 그리고 1331년 그는 문서로써 이 신하의 예를 확인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본다면 에드워드 3세는 영지에는 집착을 두었지만 단순히 프랑스왕이 되기위헤서 이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원인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일까?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의 산업을 보게 된다면 명백히 알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영국의 주요 산물은 양모였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영지인 플란더즈 지방의 주요산업은 모직물의 직조와 가공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지역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지역에 프랑스왕은 자신의 관리를 파견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당시 영국의 프라스 영지에서의 세수입은 본국의 세수입에 있어 엄청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 상인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국인들의 통상과 양모 무역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강지방의 상인들과 영국본토의 상인들은 영국왕을 충동질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을 그 당시 프랑스 역사가 리슐레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국왕에게는 프랑스의 왕위의 계승의 문제였고 국민에게는 통상과 양모 무역의 자유가 문제였다. 의장석을 둘러싸고 모여든 의원들은 국왕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군비지출을 가결하였다. 이것은 기사도와 상업주의의 야합으로 이루어진 전쟁의 동기가 이 시대의 역사에 환상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원탁에서 청로를 걸고 프랑스를 정복하겠다고 서약한 의기충천한 국왕과 한 눈을 묽은 천으로 가리면서 서약을 한 장엄하면서도 괴상한 성격을 가진 기사, 이 두계급은 자비로 출전할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십자군과 같은 순진한 경건성은 없었다. 이 기사들의 본질을 따져 보면 그들은 런던과 강 지방 상인들의 용병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지방-프란더즈 지방의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있는 상황은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당시 그지방의 국민들은 아니 주민들은 국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교황에게 200만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돈을 지불키로 약조를 했기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영국왕에게 영국문장에 프랑스 문장을 첨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렇게 되면 영국은 플랜더즈국의 적군이 아니라 동맹자가 되는 것이고 프랑스 왕에게 바쳐야할 충성의 대상이 될 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윗글에서 엿볼수 있듯이 이 백년전쟁은 왕조전쟁, 봉건전쟁, 국민전쟁 그리고 특히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영국 상인은 군비 충당을 목적으로 양모 20000포대를 헌납했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통상에 필요한 두개의 세력권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양모 구입지인 플랜더즈와 포도주 산지인 보르도를 중심으로 하는 귀이엔 지방인데, 양모대금은 부르주에서 받고 포도주 대금은 강에서 지불하고 있기때문에 그 두 지역이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전쟁은 영국 국내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영국군대가 부유한 국토에 침입함으로써 약탈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영국의 주요 정책의 특징이 나타났으며 국토의 입지조건과 국민성에 의해서 이것이 강행되었다는 것은 영국 역사상에서 중요한 일 일것이다. 그 특징은 첫째로 영국은 제해권이 필요하며, 이것 없이는 통상을 할수없고 대륙에 군대를 파견할 수없으며 이미 파견한 군대와 연락을 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영국은 대륙에 비교적 소수 부대밖에 파견할 수 없으므로 적국에 대항하는 대륙동맹을 시도하고 동맹국에게는 금전적인 지원을 아까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초기 전쟁에서 영국왕이 신성로마제국과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을 통해 알수있다.

  

영국은 독일과의 동맹에 실패하자 에드워드는 귀이엔지방으로 진격을 하려하는데 때마침 조프리 하코트로부터 노르만디 지방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작전을 변경하여 1346년에 기사 4000, 영국인과 웨일즈인 사수 10000명을 1000척의 배에 실어 노르만디 해안 라 오그에 상륙 시킨다. 여러 세대 동안 전쟁없이 살아온 이곳 지역들은 쉽게 영국군에 의해 약탈을 당한다. 영국왕은 이후 플랜더즈 지방으로 철수하려 하지만 센강의 교량이 모두 파괴되어 뽜시에서 건널수 있었다. 그 틈을 타서 프랑스왕은 군대를 모아 영국군을 기다렸다. 그래서 양군은 크리시의 아보빌에서 만나게 된다. 이 전투는 유럽 역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게된 전투였다. 왜냐하면 이것을 계기로 하여 유럽의 계급관계를 전복시키게 하는 중요한 군사적인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 옛날 게르만족의 기병대가 로마제국의 멸망과 봉건제도의 탄생을 예고했듯이 이 전투 역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전해 주었기때문이다. 즉 프랑스의 가장 우수한 봉건 기사가 웨일즈의 사수로 편성된 보병대에 의해 완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식 전술의 등장으로 인한 기사계급의 몰락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프랑스왕은 그 점을 깨달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생사가 달린 싸움에 있어 영국왕과는 달리 봉건 귀족에 의해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프랑스 국민 역시 영국군을 아직 침랴자라는 적대감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들에게는 봉건적 영토를 차지하려는 봉건 귀족간의 싸움으로만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왕은 이 전투에서 패한후 교황의 주선에 의한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그 결과 영국은 엘리자베드 시대까지 까레를 점령하여 도버해협의 지배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을 축출한후 영국인들을 이주 시킨다.

 

그 후 새로이 프랑스는 장 2세를 국왕으로 맞이하게 되자 다시 전쟁이 재개된다. 그것은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의 보르도와 노르만디를 연결하는 계획에 의해 발발하게 된 것이다. 흑태자는 랑그독을 점령하고 포아티에 방면으로 진격하여 4배의 병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격파한다.그리고 이 전쟁에서 프랑스왕 장 2세는 포로가 되고만다.

  

이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는 엄청난 파장을 맞이하게된다. 즉 자원의 개발과 전비의 조달을 위한 정부의 조치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화폐의 가치가 떨어져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군대에 붙어다니는 열병, 페스트등의 전염병이 농촌을 휩쓸어 인구의 감소를 낳게 했고 그로 인해 노동력의 감소가 일어아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폐단이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전국을 뒤덮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왕의 권위를 추락시키게 했다. 그래서 장 2세의 아들이여 장 2가 포로가 된후 섭정에 자리에 앉은 샤를르는 왕실의 권위가 약화됨에 따라 헌법에의한 권력의 제한과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 없이는 과세할수 없다는 조건을 승인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제한군주제를 창안한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담당하기 위해 귀족계급이 아닌 제 3신부으로 넘어가고 만다. 3부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1356년 소집된 삼부회에서 라웅의 주교 로베르 르 코크와 빠리의 상인 회장 마르셀 두사람이 오늘낭릐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개혁안을 제안했다. 그 내용은 왕태자가 3신분으로 구성된 3개의 평의회와 보좌를 받게하는 것이며 3부회가 기피하는 인물은 관직에서 해직 시킬수 있도록 했다. 3부회는 3년간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왕의 소집명령 없이 빈번이 회합하여 조세를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3신분들은 아직 왕과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지 못했고 그 수장이 바로 프랑스 왕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는 국토가 영국보다도 광대했고 또 교통도 불편했다. 그로인해 그 삼부회의 참여율은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국민적인 혁명을 패전 위에 구축하려는 것은 언제나 실패하게 마련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패전으로인한 국론의 통합은 강력한 권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소요가 천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에 프랑스인들사이의 국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샤를르는 브르타뉴에서 영국과의 평화조약을 채결한다. 영국왕은 프랑스와위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고 귀엔느 지방외에 포아투레, 리고르, 리무장 등의 지방을 획득하게 된다.

 

1364년에 샤를르 5세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왕태자는 브르타뉴 조약을 수정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한사람의 지도자를 따라서 지방 주들이 움직인다는 시대느 지나갔고, 영국과 프랑스, 이 두왕국은 완전히 통합되든가 근본적으로는 분리 되어야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왕국을 정비하고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셀의 입헌사상을 물리치고 절대 군주로서 통치했다. 그는 계급을 불문하고 우수한 자들을 등요하여 프랑스를 재건했다.이리하여 군대의 재건을 브르타뉴의 소 귀족 뒤 케르랭에게 일임했다. 그는 영국군과 농촌을 약탈하고 다니던 무장 도독까지 제압을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의 질서를 회복하고 영국군을 쇠진하게 만든후 그 도시를 하나하나 탈환한다. 동시에 국왕은 루앙에 있는 조병창에서 군함을 건조하고 근대적인 포병창을 창설하여 1380년에는 국토의 대부분을 영국으로 부터 탈환하게된다.

 

그러나 샤를르의 동생 필립5세는 선왕으로부터 브르고뉴 지방을 하사 받았다. 부르고뉴에 대한 증여에 대해서 샤를르 5세는 책임이 없었으나, 플랜더즈 지방의 상속자인 플랭드공의 공주와의 결혼을 권함으로써 북부와 동부의 국경지대를 하나의 왕국으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또한 브르고뉴공의 자녀의 결혼을 통하여 홀란드를 통치하고 있던 윗테스바하 가와 결연을 맺게 되자 새로 통일된 프랑스는 재분열의 위기를 맞게 된다. 봉건제도는 한가문과 지방과의 개인적인 결합을 허용하기 때문에 사적권리가 공적권리를 유린하게 되어 내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일이 빈번했기때문에 이것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불행을 초래한다.

  

군주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장점은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국가의 원수가 국민에게 군림하는데 있다. 따라서 국왕의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으면 통치의 기반도 동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과의 관계가 가장 긴박한 시점에서 정통성과 권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국왕이 샤를르 5세이후 등장한다. 바로 샤를르 6세였다. 그는 너무도 일찍 12세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왕의 숙부인 브르고뉴 공 필립은 섭정의 자리에 앉아 프랑스를 철저히 수탈했으며 폭동까지 유발시겼다. 국왕이 성년이 되자 국왕은 선왕의 노고문들을 다시 등용한다. 그러나 국왕은 미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것은 숙부 부르고뉴 공과 오르레앙 공의 권력 다툼으로 번지게 되었다. 1404년에 필립이 사망한 후 장이 부르고뉴 공이 되었고 1407년에 그의 종형인 오르레앙 공을 암살했다. 이리하여 프랑스를 여러차례 분열시키게 된 치열하고 무익한 색다른 내란의 막이 열리어 오르레앙당과 부르고뉴당이 대립하게 된다.

  

1415년에 영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가 오를레앙당과 부르고뉴다으로 분열되어 있고, 발광한 국왕의 이름으로 지지자도 없는 왕태자가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에드워드 3세처럼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했다.그래서 그역시 선대때처럼 노르만디에 상륙하여 프랑스군과 일대 격전을 벌여 승리를 하게 된다.그리고 빠리에서 왕태자가 탈주하게 되자 빠리는 부르고뉴당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자신들의 신하인 플랭더즈 지방과의 동맹자인 영구과 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왕비 이사보는 정신병자인 국왕을 강요하여 공주 카트린느를 영국왕 헨리 5세에 주고 헨리 5세를 프랑스의 섭정, 따라서 후계자로 결정했다. 왕태자는 폐위되어 무일푼으로 센강과 르와르강 쪽으로 추망된다.

 

이제 프랑스는 더이상 독립 국가가 아니였다. 영국인 베드포드 공이 섭정으로서 통치하고 있었으며 두개의 왕당파가 프랑스를 양분하고 있었다. 하나는 생후 6개월 밖에 안되는 프랑스인이 아닌 헨리 6세이고 또 하나는 축성을 받지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왕태자라고 불리는 신왕 샤를르 7세였다. 그러나 샤를르 7세에게는 재력도 병력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는 그를 왕으로 웅립하려고 하였다. 베드포드가 아무리 프랑스의 민심을 수습하려고 해도 성과는 없었다.왜냐하면 그는 어디까지나 영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북부 프랑스의 지배자인 베드포드는 중부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오르레앙을 포위하였다. 오르레앙의 시민들은 포위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하며 방어전에 돌입한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쟌느 다르크다. 그녀는 농부의 딸로서 풀밭으로 나다니는 소녀였다.그런데 그녀는 외국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는 프랑스 왕국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비록 패전은 했으나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싶어하였으며 프랑스는 이사보란 여자때문에 나라를 빼았겼으나 한 처녀에 의해 구언될것이라는 풍문이 떠돌고 있던 때였다. 대단한 독신자였던 쟌느는 양을 지키다가 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왕태자를 배알한후 그에게서 군대를 얻게된다. 그리고 그녀는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의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두가지로 나뉘게된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성녀로 영국인과 부르고뉴파의 눈에는 이단자내지는 마녀로 보이게 된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1430년에 사로잡히게 되어 영구인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이 재판에 중대성을 결부시켰다. 왜냐하면 교회가 유죄판결을 내리면 그녀가 정복한 공적은 매신적 행위가 되고 영국인들의 정복행위는 교회가 인정하는 정당한 행위가 되기때문이다.

  

쟌느 다르크의 사후에 샤를르 7세는 그녀외에 프랑스를 해방하는데 유능한 군인 리쉬몽, 라 이르, 그상트레이유, 오를레앙 공의 서자 뒤노아 등을 얻게 된다.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도 쟌느가 등장시키지 않았다면 아무런 역할도 하지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쟌느는 그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희망을 불러다 주었고 정신적인 통일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1435년 부르고뉴공 필립이 항복했다. 이리하여 내란은 종식되었고 주가 하나씩 수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는 해방이 되었다.

  

백년전쟁은 국토를 철저히 파괴했고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국가안에 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대영주들의 야망을 자극하였다.그러나 이 백년전쟁은 역사상의 많은 중요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먼저 영국에서는 그 패전으로 인해 존왕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서명하게 되었다.이것은 봉건 영주들의 자위적 수단으러써 공포 되었지만 나중에 17세기에 이르러 절대 군주와의 투쟁에서 이 범위를 확대 시켜 해석할수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 국민의식의 통합에 그의의가 있을것이다 한번도 전쟁을 자신들의 생사가 달린 것이라고 의식하지 못했던 프랑스인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게 한것이다.

 

그리고 중세 봉건 제후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다시말해 오랜 전쟁으로 인해 봉건 제후들 다시말해 기사들의 수가 줄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기사들이 보병부대에 패함으로써 군사적 중요서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 대신에 보병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당시 농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전 시대보다도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중에 왕의 직속부대의 등장으로 나중에 절대 왕정을 이루는 하나의 발판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농민의 많은 희생으로인해 그들의 자유가 전시대에 비해 한층 커졌다는 것도 간과하지 못할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양나라에는 비롯 그것이 그 효용성은 크지 않았지만, 근대에 민주주의라 불리울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진보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6. 적용점

중앙집권체제에 대하여

국민의식 성장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발언-기득권세력의 약화

  

'21세기판 백년전쟁' 프랑스 vs 잉글랜드

앞서 언급했듯이 유로 200490년대와 2000년대를 가로지르며 맹위를 떨친 축구계의 수퍼스타들이 대거 참석하며 빛을 발했다. 이것은 사족이지만, 세계 축구의 강호 이탈리아가 승점 쌓기에 방심한 탓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사실은 그 찬란한 빛을 약간 떨어트리게 만드는 요소였지만 말이다. 어쨌건 월드컵보다 적은 참가국, 그리고 유럽에 국한되어 있는 한계 특성상 유럽축구선수권대회는 매 경기마다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2004년 여름, 유로 2004B조를 유심히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B조는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잉글랜드, 스위스, 크로아티아가 포진되어 있었다.

 

1라운드 대진표는 스위스 대 크로아티아, 그리고 프랑스 대 잉글랜드로 결정되었다. 이때 수많은 외신과 축구 관련 언론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맞대결에 주목했다. 이 얼마나 나오기 힘든 대진표란 말인가. 유로 2004 예선전에서 페널티킥을 날리는 등 체면을 구긴 베컴이지만, 어쨌거나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주장이자 그들의 힘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지단은 말할 필요 없는 우승 청부사였다. 각각의 대표팀은 신구 조화가 잘 어우러져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프랑스는 이전 대회인 유로 2000 우승 멤버들이 대거 참석했고, 잉글랜드는 당시 두려울게 없었던 축구의 신동 웨인 루니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이들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바로 데이비드 베컴과 지네딘 지단이다.

또 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좌우 윙 미드필더를 책임진다. 지단은 주지하다시피 본 포지션이 공격형 미드필더이지만, 왼쪽 윙 미드필더로 자주 배치되곤 한다. 베컴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오른쪽 날개 요원이다. 좌우 날개들의 대결이자, 세계 최고의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들이 진검을 가리는 승부였다. 많은 축구팬들은 베컴이 맨유를 박차고 레알 마드리드로 날아왔을 때, 드디어 세계 축구를 책임지는 수퍼스타들이 레알 마드리드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쳤다고 말하며 그들을 주시했었다. 더 이상 각자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지 않을 것 같았지만, 베컴과 지단은 B조의 1위를 향해, 그리고 나아가 앙리 들로네 컵 (유로 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위해 서로를 향해 으르렁 거려야만 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B1라운드 경기는 2004613,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스타디오 다 루스 (벤피카의 홈 구장)에서 펼쳐졌다. 'Estadio da Luz (빛의 구장)' 라는 이름답게, 경기장의 화려한 불빛은 프랑스, 잉글랜드 팬들에게, 그리고 축구 전투사들이 싸움을 벌일 초록 그라운드를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바로 그 경기가 유로 2004의 조별리그 경기 중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와 티켓 판매를 기록했다고 전해지며, 언론은 이 경기를 일컬어 '미리 보는 유로 2004 결승전', '21세기판 백년전쟁' 이라 칭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았던 문구는 다름아닌 '백년전쟁' 이 되겠다. 110년 이상 지겹도록 영국,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지역 분쟁이 이번에는 축구공으로 되살아난 격이겠다. 이런 세계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언론과 팬의 호들갑은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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