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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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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상호간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공동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하는 혈통적, 종교적 유대감을 소유하고 있으며, 같은 지역 안에서 같은 민족 사이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성장한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본고는 두 종교의 기원과 역사, 그 교리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데 반하여 유대교에서는 기껏 예언자 정도로 간주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유대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도 거부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이른바 대리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의 이상세계가 이 지구상에서의 공간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기독교에서의 천국이란 이 세상질서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지칭한다. 유대교에서는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전제하는 데 반하여,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분명 유대교의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다. 이슬람교가 이삭의 이복형 이스마엘의 계보에서 성립되었던 데 반하여, 이 두 종교는 이삭의 혈통을 중시한다. 그럼에도 과연 누구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느냐의 차이가 여전히 남아있다.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초림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며 믿고 있다. 초림 메시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여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다가 승천하였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재림의 구주로 이 땅에 다시 온다. 말하자면 기독교에서는 재림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말하자면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면 그 때가 바로 예수가 재림하는 날이고 이 세상의 종말과 천국의 도래가 동시에 일어나는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겉으로는 기독교적 서방세계와 이슬람교적 아랍 세계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대 나라 안에서 일어난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대립을 이해하는 일은 세계적 역사인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주제어>아브라함, 이삭, 출애급, 탈무드, 예수, 메시야, 성경, 천국, 이스라엘, 최후의 심판          


1. 서 론

 모세 오경을 원전으로 삼고 있는 계율종교이며 일신교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데다, 아브라함을 공동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왜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유대교가 유대민족 전체의 공통된 신앙체계라 한다면, 기독교는 그 유대교의 터전 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도들은 초창기부터 기독교도들을 핍박하였거니와, 나중에는 기독교에서 그들에게 보복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했던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 구세주(메시아)에 대한 양 진영의 입장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계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중동 사태에 대해 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세계평화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본고는 두 종교의 탄생 배경과 기원, 그 교리와 더불어 메시아에 대한 상호간의 관점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2.기원

 유대교의 시발점이자 동시에 중심점이 되는 사건은 출애굽이다. 사 백년 동안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이 사건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해방이자 가나안 여정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들이 섬기는 신 ‘야훼’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로 표현되고, 이 과정에서 겪었던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 무교절, 장막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킨다.

 그렇다면 출애굽은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있던 아브람을 불러 그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한다. 아브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고 그가 정착한 곳이 바로 오늘날 팔레스타인인 가나안 땅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으며, 야곱은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형성하게 된 열 두 아들을 낳는데, 그 중에서 요셉은 형들의 시기 질투로 말미암아 애급으로 팔려가고 만다. 그러나 나중에 애급의 총리가 되어 그 아비와 형제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유대인들은 애급에 뿌리를 박고 살게 된다. 그러나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고역을 당하게 되는 바, 바로 이때 모세가 등장하여 백성을 애급으로 탈출시키는 것이다. 

 유대교에는 뚜렷한 창시자가 없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조상으로 하는 유대민족 전체의 공통된 신앙체계이기 때문에, 경전 역시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하여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메시아(Messiah)에 관한 사상이다. ‘기름 부은 자’의 뜻을 가진 메시아는 구세주로 번역되는데, 희랍어로는 크리스트(Christ)라고 한다. 즉 유대인들은 태고 때부터 신으로 선출된 메시아가 출현하여 지상에 신도를 세우고 모든 인류를 구제한다고 하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멀지 않은 장래에 메시아가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그의 세례를 받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스스로 신의 아들 구세주라 칭하며 신의 교훈을 설교하자 모든 민중이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가 갈라진다. 즉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이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믿는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그를 기껏 예언자 정도로 간주한다. 구세주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는 편협한 유대인들의 신앙을 비판하였다. 그가 “화 있을 진 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39)라고 외쳤듯이, 그가 가장 경계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당시 형식적 신앙과 율법을 중시하는 자들이었다. 모든 인류가 신 앞에서 평등하고 모두가 같은 동포, 형제자매이며 그러기에 민족적, 사회적 입장을 초월한 사랑이 베풀어져야 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뱀들”로, “독사의 새끼들”(마23:33)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예수가 보인 과도한 증오심은 기독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 민족 내부에 있음을 일찍이 간파한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는 내면적 신앙과 영혼의 구제를 강조하는 한편, 지상의 부와 권력이 공허함을 말하였다.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을 체험한 예수는 이후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는데, 바로 이때 사탄으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는다. 그리고 결국 이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의식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가치관이 ‘비 보통적’(extraordinary)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로고스 즉 ‘의미’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후,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고 외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외침이야말로 그의 생애에 있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초지일관한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그는 열 두 제자와 따르는 무리들에게 ‘물질이나 육체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그 내용에 있어서 가히 파격적이었거니와, 그의 행동 역시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정결 제도’에 따라 병자나 죽은 사람, 피 흘리는 사람, 불의한 사람, 천한 사람 등을 피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부정을 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밥상교제’에는 창녀나 세리 등 당시 천시 받던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예수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했지만 전통적 유대주의자들에게는 그의 모든 말(메시지)과 행동이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공의’가 신앙의 중심내용이던 당시에 ‘사랑’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불경시 되던 당시,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격인 존재로 표현한 예수는 분명 참람한 존재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고난은 일차적으로는 전통적 유대주의자들의 반감과 증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다고 하여 전적으로 그들만에 의존했다고 볼 수도 없다. 예컨대, 로마인들은 정치범에 한해 십자가형을 내렸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결국 그가 정치범이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유대인들의 저항이 잦아 로마인들은 그에 대한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바, 특히 갈릴리는 무력봉기로 로마를 물리치려는 열심당의 본거지로서 민란이 잦은 곳이라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갈릴리 사람 예수가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는 등 백성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그를 처형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순리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는 유대인 때문에 죽었고, 로마인은 유대인들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기술한 것은 오류라고 하는 지적도 있다. 바로 이것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미워하고 박해한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주장에 동조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과도한 적개심은 상당한 부분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3.경전

 유대교는 유대민족 전체의 공통된 신앙체계이기 때문에, 경전 역시 “유대민족 전체가 겪은 체험의 기록이자 희망의 표현”이다. 유대교는 구약성경 가운데 이른바 모세 오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일상생활에 있어서 행동의 규범을 정해놓은 <탈무드>를 기본 교재로 삼고 있다. 즉 유대교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Torah), 구전 율법인 미쉬나(Mishna), 그에 대한 해설서인 탈무드(Talmud)를 경전으로 삼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수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가령 시편과 잠언 그리고 욥기의 저자들에 의해 계속되어 오다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의 고전 랍비 시대에 나타난 탈무드 속에서 통합 정리되었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 이후의 성경 역시 그 정신에 있어서는 토라라고 할 수 있다.”

 토라는 모세 오경의 히브리 원본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정확성을 위하여 손으로 쓰여지고 정성 들여 편집된 것이다. 형식은 이야기 체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세계의 창조로부터 모세의 죽음에 이르는 사건들을 담고 있다. “결국 유대교는 성전(聖典)에서 유래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며 그 내용을 밝혀주는 책의 종교인 셈이다.”

 그러나 토라는 이야기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것은 만물의 창조자이며 계율 부여자이며 해방자이자 구원자이신 유일하고 보편적인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또한 토라는 의식(儀式)과 성일(聖日) 그리고 축제일을 규정하고 있으며, 예배와 식전(式典)의 적절한 형식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교회법과 시민법 그리고 형법의 규범을 알려줄 뿐 아니라, 종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규정해준다. 그 곳에는 ‘유대민족은 성직자의 왕국이며 신성한 민족이며, 유대민족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한편 성경은 약 3500년 전에 기록되기 시작하여 약 40명의 저자에 의해 1600년 만에 완성된 66권의 책을 통합한 책이다. 초대교회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지금의 구약인 히브리어 성경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지금처럼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에 그리스도인들은 글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가장 먼저 쓰인 것은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곧 재림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기록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더구나 70년에 예루살렘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도 사라졌기 때문에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예수에 대한 기록은 4복음서 이외에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사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서술한 전기나 역사적 기록이라기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밝히는 ‘신앙고백서’나 믿음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신앙해설서’의 성격을 가지므로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또한 저자나 연대가 모두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책을 한권으로 통합하고 일관성마저 유지하게 한 것은 일종의 기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이라는 구절이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어떻든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은 신약 성경이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경전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교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보아도 기독교는 유대교와 한 뿌리를 갖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그리고 내용상으로도 유대교에서 파생된 종교임을 알 수 있다. 

 

 4.교리

 유대교에 신조(교리, dogama)가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명백한 종교관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명백한 신조로 피력하는 일은 가급적 피해 왔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즉 보통의 종교들이 교리를 첫째로 하고 윤리를 둘째로 했던 데 반하여, 유대교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면, 유대교는 ‘너희가 나의 계율을 지키기만 한다면 나를 버려도 좋다!’고 말한다.

 유대교 교리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점은 유일신 사상이다. 물론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진 신, 초월적인 인격적 신에 대한 믿음은 인류역사를 통하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에서는 대개 다신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신들은 사람이었다. 서로 싸우고 정복하고 그리하여 때로는 패배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직 유대교에서만 신은 하나로, 절대자로서의 유일신으로 등장한다. 이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믿는다는 것은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초월적 신이 전지전능하고 무소 부재하여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고 섭리 주관하며, 그의 나라와 백성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 세계가 약육강식의 무정부상태가 아니고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인류 역시 하나의 통일체라고 하는 신념의 체계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형태의 영적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의 선전포고였다. 가령 조로아스터교는 두 개의 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 이원론을 거부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빛과 선뿐만 아니라 어둠과 악도 만드시며 또 그것들을 지배하신다. 여호와만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호와와 그 율법에 전적으로 충성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유일한 원리를 내세운 철학이나 종교는 이밖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의 유일신은 유일절대자가 결코 추상적인 원리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격자, 즉 신이다. 이 점에 유대교의 독창성이 있다. 여기에서의 신이란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과적 작용만을 하는 원리가 아니고, 숨쉬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창조하고 상을 주고 벌을 주기도 하는, 즉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그 신은 때문에 전지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창조자이며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과거로 끝나버린 창조주가 아니고, 여전히 살아 계셔서 이 세계와 인간을 관장하시는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매일 창조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신다.

 물론 바벨론 포로 그 이후에는 “의인화가 점점 배제되면서 신의 초월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초월적인 신을 경외하여 ‘야훼’라고 읽지 못한 채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는 말로 읽을 정도였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도 거부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육화(肉化)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을 반영하며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한 인간이 하나님 자신일 수 있다는 주장은 신성모독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어떠한 신인(神人)도, 천사도, 옹호자도 개입하지 않으며 어떠한 간섭이나 관여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인간과 분리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사람들을 대신하여 모범을 보이거나 용기와 가르침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대리구원이란 있을 수도 없으며 있지도 않다. 인간은 개인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이 세계를 창조하였고 모든 생명체를 만들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 즉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었으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낙원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그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바로 이때 아브라함이라는 한 유대인이 나타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한 인간을 통하여 그가 소속된 유대인, 전 인류를 원죄로부터,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와 일종의 약속을 맺는데, 이 약속을 바탕으로 유대교가 탄생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선택한 셈이 되고, 그리하여 유대교에서는 ‘선민의식’이 중요한 종교적 모티브로 작용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실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는 오직 유대인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다. 

 기독교에 있어서도 인간들이 범죄하여 낙원에서 추방당했다고 하는 스토리는 유대교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비극을 결코 참아보지 못하시고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 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전체 인류를 대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당하고 죽게 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의해 그 죄를 대속 받은 인간은 누구든지 예수와 그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천국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유대교에서는 천당이 우리가 죽은 후에야 갈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이 지구상에서의 이상적 삶을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에서의 천국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삶을 가리킨다. 그 곳은 이 세상 질서와는 다른 세계, 정신적 내지는 영적인 세계이다. 그리하여 복음이란 것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는 소식이며, 우리도 그 곳에 가서 살 수 있다는 복된 소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건너야 할 다리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천국에 가기 위한 준비이며 그 예비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앞으로 천국에서 전개될 영원한 삶에 비추어서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에서는 이 지상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으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 예수가 자주 천국 이야기를 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국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기독교 신자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 목숨을 희생적으로 바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궁극적인 해답을 제공해준다. 

 둘째, 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에서는 그를 많은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뿐이다.

 셋째, 유대교에서는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서로 형제자매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의 뿌리는 유대교에서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그 교리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궁극적으로는 모두 같은 바탕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5.의례

 유대교도들은 원칙적으로 율법에 따라 사내아이들은 어릴 때 ‘언약의 표’로 할례, 즉 종교적 의미를 갖는 포경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음식을 가려 코셔(Kosher)를 지켜야 하는데, 즉 <레위기> 제11장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녀간에 13세가 되면 바르 마츠바(계명의 아들), 바트 미츠바(계명의 딸)라는 성인식을 갖고 유대 사회에서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갖도록 하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또 교도들은 유대교회당에 참석해야 한다. 유대 월력에 따라 속죄절을 지켜야 하고, 모세의 지도로 출애굽한 일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의식을 지켜야 한다.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이러한 안식일 제도는 유대인의 종교생활에 있어서 그 근간이 된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고 하는 말이 성립될 정도이다. “7일에 하루를 쉬고 그 쉼을 성스럽게 한 것은 유대교가 전체 인류를 위해 이룩한 중요한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는 어느 교파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들만의 특수한 율법 모세 오경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의식 혹은 예식 그리고 행위를 규정하는 율법이 다르며, 종교적 상징들도 자연히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므로 유대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정통파, 보수파, 그리고 개혁파들의 믿음의 자세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어떤 초월적인 숭배의 대상 그리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전제한다. 말하자면 ‘영적인 것’, ‘성스러운 것’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세계가 존재함을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세계와 인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랍비(rabbi)라고 부르는 사제가 모든 종교생활을 지도하고 모든 의식을 인도한다. 

 한편 기독교의 상징은 예수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이다.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이면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미사나 예배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한다. 또 예수가 탄생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 성탄절에 휴가를 얻는다. 예수가 사망권세를 이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부활절을 지킨다. 

 이 외에도 무수한 의식행위와 상징물들이 있다. 이것은 각 교파에 따라 다른데, 가령 카톨릭 신자들이 하는 의식은 개신교의 그것과 같지 않다. 따라서 러시아나 그리스에서의 의식은 미국이나 영국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미신적 행위라 비난받을 수 있고, 한국이나 일본인들이 갖는 종교적 상징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 역시 특별한 종교적 의식을 올리며 특별한 상징물을 존중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과학이 잘 발달된 서구사회이지만,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이러한 의식이 생략된 기독교는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이것은 여타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6.상호 관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의 민족으로 선택받았다고 확신했다. 특히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 선지자 에스라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 아내들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추방함으로써 선민(選民)사상의 싹을 키운다. 즉 유대인들은 태고 때부터 신으로 선출된 메시아가 출현하여 이 땅에 신의 도를 세우고 모든 인류를 구제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던 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의 정치적 몰락으로 인하여 더욱 강렬하고도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메시아가 출현함으로써 모든 이교도(異敎徒)는 멸망하고 유대인을 중심으로 세계가 통일될 것이다’라고 하는 사상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었고, 가까이 해서는 안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마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고 있는 바,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7)라거나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이라는 구절이 보이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라는 구절에서 보듯,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방인, 즉 빌라도와 로마 병사를 ‘법 없는 자’로 지칭하고 있다. 바로 ‘이때부터 유대인과 그 주변 이방인들 사이에는 서로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들에게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에 따라 선택된 민족으로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인들의 믿음이 바로 시오니즘(Zionism)이다. 이에서 보듯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신앙, 유대교를 통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니와, 이것이 배타성으로 작용할 때 오늘날과 같은 중동의 상황을 초래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자들은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때 성령의 임함을 체험했고, 베드로는 ‘예수가 주이자 그리스도임’을 전했다. 이 일로 하루에 3천명이 세례를 받고, 제자로 합류했다. 공동체가 점점 커져감으로써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른 사람의 수가 증가하면서, 유대인의 반대와 박해도 그만큼 커져갔다. 이에 사도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각처로 퍼졌다. 이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와의 만남을 체험하고, 새 사람 바울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는 즉각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그리스도임’을 전했다. 그 후 얼마간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내적 준비를 갖춘 다음, 그는 마침내 위대한 전도자로 등장했다.

 기독교의 세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바울은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이를 위해 그는 특히 구원의 의미를 ‘은혜’ 중심으로 새로이 설명함으로써, 유대 관습에 낯설었던 이방인들에게 문화적 충격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행위를 중시했던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던 바, 예컨대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관계는 결국 ‘믿음과 행함은 상호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바울은 처음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다가, 스스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자처하며 지중해 전역으로 전도여행을 세 번이나 떠났다. 그의 열성적인 전도와 깊은 신학사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어엿한 보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약 30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던 바울은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60년 무렵, 로마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 언급은 없으나, 65년 무렵 그 곳에서 처형되었다고 본다.” 어떻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세 번에 걸친 바울의 전도여행과 로마에서의 순교가 그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권위는 예수의 친족이나 직계 제자들이 행사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없어진 후, 로마교회가 가장 중요한 교회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서기 165년 로마에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는 건물이 세워졌으며, 256년에 로마의 스테파누스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위임한 내용(마 16:18-19)(“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을 근거로 하여 교황 중심의 권위를 확립했다. 현재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갖고 있다. 전체 신자를 고려할 때,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기초로 두 종교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동일한 <구약성경>과 신을 믿고 있다. 그리고 <구약>은 구주 탄생을 예언하고 있다.(이계성 214쪽) 그런데 기독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데 반하여, 유대교는 그를 구주로 인정하지 않으며 아직도 여전히 구주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 반목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많다. 첫째, 일부 그리스도교인은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증오하고 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마저 ‘유대교 회당을 불지르고, 유대인의 집을 부숴 버리라’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홀로코스트의 무고한 600만 대학살은 기독교 내부에서 배양된 반 유대주의를, 나치가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현실화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유대교인의 경우, 현재 기독교도에 대해 원한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들의 가족과 민족을 박해와 대학살로 몰아넣은 데 대해, 기독교도들이 일조를 한 교회의 교리와 영향을 증오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카톨릭 및 루터 교회는 유대인에 대한 과거 교회의 잘못을 시인하고 있다. 2000년 3월, 로마 교황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직접 터놓고 사죄한 일은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7.결론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까지 겹쳐 현재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바, 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면에는 시오니즘이라는 종교적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양 진영의 분쟁에는 모든 인류의 지대한 관심과 함께 고통이 내재되어 있다. 

 결국 서로를 용납하는 가운데 세계 평화를 지향해나가는 것이 인류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한다면, 두 종교는 자신들의 독선과 배타성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세계의 아픔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본 작업은 비단 종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사적인 제 사건들을 그 내면에서부터 조망하는 일에 일조가 되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하나의 지구촌에서 살게 된 기독교인은 더 이상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종교간의 대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모형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역시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고착되는 대신, 보다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중동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에도 이바지할뿐더러, 여전히 민족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는 유대교로 하여금 보편적인 종교에로 나아가게 하는 데에도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두 종교 간에는 인접한 지역적 특성 외에도 타종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밀접한 내적 연관성이 발견되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데 반하여, 유대교에서는 기껏 예언자 정도로 간주한다. 전통적 유대주의자들에게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이 도전으로 간주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비록 로마 당국의 은밀하고도 조직적인 음모가 있었다고 보아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구한 쪽은 유대인들이었다.   유대교인의 입장에서 예수는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이단의 괴수’ 정도로 비쳤을 것이고, 반면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유대교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는 족속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유대교인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성립된 약속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에 익숙해 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한에서 인간은 어차피 죄인일 뿐이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보내신 그 아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통하여 그가 소속된 유대인, 전 인류를 원죄로부터,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와 일종의 약속을 맺는데, 이 약속을 바탕으로 유대교가 탄생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써 유대인을 선택한 셈이 되고, 따라서 오직 유대인만을 통하여서만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대망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이러한 선민의식이 배타성을 띨 때, 오늘날과 같은 중동의 불안한 정세를 유발할 수 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유대교에서는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전제하는데 반하여,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서로 형제자매임을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었을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종교 사이에는 유일신을 신봉하는 등의 유사성과 함께 교리 등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도 발견된다. 각 진영에서는 각자 스스로의 무오성(無誤性)과 정통성을 고집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영혼 구원이라는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랄지 세계 평화라고 하는 인류의 공통된 가치관에 동의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가운데 최대한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갈등을 치유하는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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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요시코, 이계성 옮김, 3일만에 읽는 성경이야기, 서울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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